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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품인냥 판매(?)하였다. 그리고 냉전시대의 영역경쟁을 하던 미국의 싸구려 원조+박정희의 어이없는 구걸로 일본에게 얻어낸 3억불(배상금도 아닌 독립축하금.이 것으로 일제 35년간의 강제징용자.종군위안부 문제를 한큐에 넘긴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씨바)+베트남전에 파병된 우리 젊은이들의 피값 10억불 등을 종자돈으로 초고속부실공사로 이루어진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고 그 후 그

몸을 불질러 노동3권 수호를 외친다...)인간답게 살기를 원했던 노동자.그리고 민주화를 외친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고 고문하고 죽였다... 이것이 바로 박정희 개발독재의 성과 뒤에 숨은 어둠이다.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쉽게 말해 아랫목에 불이 날 정도면 윗목에도 온기가 조금 돈다. 이 논리를 바탕으로 한 개발독재 덕에 윗목에 앉은 서민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무능하고 부패했던 정부라고 여겨졌던(항상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술된다.박정희에 의해 동시대 가장 민주적인 정부는 패배했다) 제2공화국의 장면내각 때 이미 박정희가 계획한 것으로 여겨졌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그것을 날로 먹어서 재포장하여

재정적자 등으로 당시 아르헨티나,브라질, 멕시코와 함께 세계 4대 채무국가로 전락하고 국가부도 상태인 모라토리움까지 겪음. (구체적으로 보면 97년의 경우 순외채가 GDP의 10% 규모라지만, 79년의 경우 약 50%이었고 70년대 초반과 79년 이후 기업의 채무 재조정 금액은 97년 이후와 대비하여 각각

즉 74년, 80년 5월 등 다수의 IMF 사태가 조사 연구됨. 특히 전 경제 부총리 정인용의 회고록에 의하면 한국은 65년부터 97년까지 총 17회 IMF에서 구제 금융을 받았고 오일쇼크 당시에는 모라토리움(국가부도)까지 당했음. **참고사항: 94년, 95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시아

날까지도 국민들은 구경하기도 힘든 수입금지 품목인 고급양주 "시바스리갈"의 매니아를 자처하며 즐겨 마시고 주색에 빠져 옆에 여자 2명을 끼고 있다가 김재규의 총에 저 세상으로 간 박정희의 어디를 봐서 청렴을 논할 수 있을까? (2)박정희가 없어도 우리 나라 경제는 일어날수 있었다.

밥은 먹게 되었고 -_- 아랫목에 앉은 정경유착한 기업들은 펄펄 끓는 온기에 정신 못차리고 헤벌레하다가 경쟁력을 잃어 외환위기를 계기로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일명 박정희식 모델로 불리는 개발독재로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들이 있다. 일명 신흥공업국가니 아시아의 용이라고 불려졌던 대만.싱가폴.한국.말레이시아 등은 비슷한 시기에 유동성 위기를 맞이하게 되고(그 이유야 복합적이지만

생각할줄 모르는 돼지가 되었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1) 박정희는 결코 청렴결백하지 않았다.(밑 글부터 다수 자료 펌) 0. 서울 강남권개발-정치비자금 마련을 위해 미리 강남지역에 땅투기를 한뒤에 강남개발을 발표하고 땅을 매각하여 엄청난 차익금을 마련하여 정치비자금을 사용함. 망국적인 부동산 투기의 열풍을 일으킴. 1. 증권파동-공화당 창당 자금 마련을 위해 증금주(

사건을 초래케 함 10. 농협 비료 부정 사건-예비역 대령 출신인 백승빈이 약 50억원의 농협 비료를 강탈함. 단순 사기 사건으로 처리함. 11.박정희의 축재-현재도 정수재단(박정희,육영수)명의로 대부분 보유. *MBC,부산일보-지학순 주교 및 三和(60년대 10대 재벌) 사주의 증언에 의하면 원주 MBC,부산MBC,부산일보 등을 강제로 빼앗김. *영남대,정수기능대,영남종금. *경향신문(사후에 한화에서 인수). *어린이 대공원 (여동생과 법정까지가는 재산싸움을

기술개발을 추구하지 않는 근본이 잘못된 국가는 한계를 초래한다고 예언하였음. 박정희 정권은 당시 경제위기를 1, 2차 오일쇼크로 포장하여 면피하였으나 경쟁국인 대만과 싱가포르 등은 만성무역흑자, 채권국가였지만 한국은 베트남, 서독, 중동 등에서 수백만 이상의 국민들이 천문학적인 외화를 획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경유착, 관치금융 등의 실정으로 만성 무역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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